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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주익 (18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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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엄주익은 1872년 한성부에서 태어난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교육가이다. 그는 순헌황귀비의 7촌 조카로, 1900년 농상공부 통신원, 1903년 군부 협판 등을 역임했다. 1904년 일본 시찰 후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양정의숙을 설립, 숙장으로 취임하여 교육 활동을 펼쳤다. 한일 병합 조약 후 관직에서 물러나 교육 사업에 전념했으며, 양정의숙 의사장과 양정고등보통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31년 사망했으며, 그의 장례식은 학교장으로 거행되었다.

2. 생애

1872년(고종 9년) 6월 26일 한성부에서 엄인영(嚴仁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종의 후비이자 영친왕의 생모 순헌황귀비 엄씨의 7촌 조카였다.

1900년 농상공부(農商工部) 통신사 통신원 전화과(通信司 通信院 電話課)를 역임했으며, 1901년 내장원(內藏院) 종목과장(種牧課長), 1902년 군부(軍部) 포공국장(砲工局長), 한성부판윤을 역임했다. 1903년 군부 협판(協辦)과 보병참령이 되었다.

1904년 군부 협판으로 재직 중 근대적인 군사 제도를 시찰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 서양의 새로운 사조에 접한 당시 일본의 새 문물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당시 상황에서 급선무는 교육의 보급임을 절감하고 귀국 후 양정의숙(養正義塾) 설립을 추진하였다.

1904년 5월 육군참령이 되고 일본을 방문, 군사제도 관련 시찰을 하고 귀국했다. 그해에 법부(法部) 협판, 대한제국 육군 참장(參將), 군부 협판, 군부대신서리 등을 역임했다. 1905년 2월 서리 교육총감이 되었다.

1905년 2월 올바르게 길러서 깨우쳐준다는 '몽이양정(蒙以養正)'의 기치를 내걸고 기부금과 사재로 양정의숙을 설립하고 숙장(塾長)에 취임하였다.[1] 1907년 순헌황귀비로부터 경선궁(慶善宮), 영친왕궁(英親王宮)에 소속된 전라남도 함평군, 무안군, 광양군, 경기도 이천군, 풍덕군 등 약 200만m2의 토지를 하사받았다.[1]

한일 병합 조약 이후부터는 사망할 때까지 교육 사업에만 전념했으며, 1913년 재단법인 양정의숙 의사장, 1913년 10월 양정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선임되었다.[1]

1931년 4월 26일 경성부 종로구 관철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직전 만주 동포에 구호, 위문품으로 바지 등을 기부했는데, 그가 사망하고 7개월 만에 만주 현지에 전달되었다.

엄주익 장례식
(경성부 종로구 광희정 구 훈련원 광장)


장례식은 4월 22일 양정고보 학교장으로 거행되어 광희정(光熙町)의 구 훈련원 광장에서 노제를 거쳤다.[1] 학교장 장례식에는 양정고보 학생 6백여 명,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의 대표 학생들, 조선총독부 조선군 사령부에서 특별히 보내준 의장대 2백 명이 장례식을 호송하였다.[1] 시신은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암사리(현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의 선영에 안장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1872년(고종 9년) 6월 26일 한성부에서 엄인영(嚴仁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종의 후비이자 영친왕의 생모 순헌황귀비 엄씨의 7촌 조카로, 엄주익은 순헌귀비의 증조부 엄성복(嚴性復)의 장남 엄재화(嚴載和)의 증손자였다.

16대조 엄유온(嚴有溫)은 조선 초기에 좌군도총재를 지냈다. 6대조 만향재 엄한붕(晩香齋 嚴漢朋)은 1728년 이인좌가 일으킨 무신난 진압에 참여하여 원종공신이 되고, 증 한성부좌윤에 추증되었다. 5대조 엄계응은 관직이 없었으나 형제인 종5대조 엄계흥 등과 함께 송석원시사에서 활동한 이름 있는 시인이었다. 고조할아버지 엄성복은 사후에 증 승정원좌승지 벼슬에 추증되었는데, 이는 종증조부 엄재우의 아들이며, 엄주익의 큰 재종조부가 되는 엄진일의 출세에 의한 증직이었다.

엄진삼은 그의 양 조부 엄진필, 친 조부 엄진국의 사촌 종형제간이었다.

2. 2. 관료 생활

1900년 농상공부(農商工部) 통신사 통신원 전화과(通信司 通信院 電話課)를 역임했으며 1901년 내장원(內藏院) 종목과장(種牧課長), 1902년 군부(軍部) 포공국장(砲工局長), 한성부판윤을 역임했다. 1903년 군부 협판(協辦)과 보병참령이 되었다.

1904년 군부 협판으로 재직 중 근대적인 군사 제도를 시찰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 서양의 새로운 사조에 접한 당시 일본의 새 문물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당시 상황에서 급선무는 교육의 보급임을 절감하고 귀국 후 안종원(安鍾元), 이철우(李哲宇), 윤정석(尹晶錫), 박용숙(朴容淑), 장현주(張炫周), 김진현(金鎭賢), 한만용(韓晩容) 등과 함께 양정의숙(養正義塾) 설립을 추진하였다.

1904년 5월 육군참령이 되고 일본을 방문, 군사제도 관련 시찰을 하고 귀국했다. 그해에 법부(法部) 협판, 대한제국 육군 참장(參將), 군부 협판, 군부대신서리 등을 역임했다. 1905년 2월 서리 교육총감이 되었다.

2. 3. 교육 활동

1905년 2월 올바르게 길러서 깨우쳐준다는 '몽이양정(蒙以養正)'의 기치를 내걸고 기부금과 사재로 양정의숙을 설립하고 숙장(塾長)에 취임하였다.[1] 1907년 7월 순헌황귀비로부터 경선궁(慶善宮), 영친왕궁(英親王宮)에 소속된 전라남도 함평군, 무안군, 광양군, 경기도 이천군, 풍덕군 등 약 200만m2의 토지를 하사받았다.[1]

한일 병합 조약 이후부터는 사망할 때까지 교육 사업에만 전념했으며 1913년 재단법인 양정의숙 의사장, 1913년 10월 양정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선임되었다.[1]

2. 4. 최후

(경성부 종로구 광희정 구 훈련원 광장)]]

장례식은 4월 22일 양정고보 학교장으로 거행되어 오후 8시 관철동 자택을 나와 광희정(光熙町)의 구 훈련원 광장에서 노제를 거쳐 장지로 향하였다.[1] 학교장 장례식에는 양정고보 학생 6백여명, 진명여학교, 숙명여학교의 대표 학생들, 그밖에 조선총독부 조선군 사령부에서 특별히 보내준 의장대 2백 명이 장례식을 호송하였다.[1] 시신은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암사리(현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의 선영에 안장되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고조부엄성복(嚴性復)승정원좌승지
종증조부엄재우(嚴載祐)순헌황귀비의 친할아버지
재종조부엄진일
재종조부엄진삼
7촌 종고모순헌황귀비고종의 후비, 영친왕의 생모
증조부엄재화(嚴載和)
양조부엄진필(嚴鎭弼)
친조부엄진국(嚴鎭國)
친조모경주 석씨
친삼촌엄하영(嚴夏永)호적상 5촌
친삼촌엄두영(嚴斗永)호적상 5촌
친고모2명호적상 5촌
엄인영(嚴仁永)
엄주승(嚴柱承)
부인이름 미상
아들엄경섭(嚴敬燮)1906년 ~ 1979년 9월 6일
손자엄규백
아들엄동섭
아들엄태섭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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